신들의 나라! 일본의 고대 역사서에 신으로 등재된 천황들의 휘(諱)와 시호(諡號)를 한국어 식으로 명쾌하게 풀이함으로써 일본열도를 긴장시킬 역작 국내 우선 출간!
-신라 「향가(鄕歌)」, 일본 「와카(和歌)」와 「만요슈(萬葉集)」 연구의 독특한 해법제시로 양국 고대사학계를 놀라게 한 형제 역사학자가 쓴 화제의 신간!
일본인들의 의식구조 속에는 자신의 나라가 ‘신들의 나라’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고, 천황의 존재는 그 숱한 신들의 정점에 자리 잡고 있다. 천황은 신이기 때문에 성이 없고 이름뿐이다. 우리가 일본 고대사 연구에 깊이 천착하면서 특별히 주목한 것은 신으로 추앙되던 고대 일본천황들의 중국식 시호(두 글자로 된 짧은 명칭) 옆에 또 다른 긴 이름이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한자(漢字)로 표기했지만 정격(正格)한문이 아니어서 그동안 일본학계는 그 뜻을 전혀 해독하지 못했다. 그냥 나열된 한자를 일본식 음ㆍ훈독(音ㆍ訓讀)으로 호칭할 뿐 뜻은 잘 알 수 없다는 식으로 치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자차용(漢字借用)으로 기록된 제법 긴 수수께끼 같은 이 별칭들은 이른바 신라의 향찰식 표기처럼 음독과 훈독의 조합을 통한 ‘소리 매김 부호’로서 고대 한국어로 읽힌다는 중요한 발견을 통하여 이 책이 쓰였다.
이 책은 부제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일본 천황들의 이름을 연구하여 그 이름이 지어지게 된 내력과 그 이름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밝힌 연구서이다.
이 책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일본인들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천황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는가?
일본은 가히 '신(神)들의 나라'로 불릴 만하다. 일본열도의 곳곳에 신들을 모신 각종 신궁(神宮) 및 신사(神社)에 대한 참배행위도 일상화 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숭배하는 온갖 신들 가운데서도 으뜸은 역시 천황이었다.
소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이 미국에 패망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선언을 한 일본국왕은 그 이전까지만 해도 현신인(現神人)으로 추앙받았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신의 나라 백성이라는 일본인의 특이한 의식구조에서 연유한다. 대관절 그와 같은 사고방식의 연원(淵源)은 어디서부터인가?
그것은 일본인들이 단순한 역사서를 넘어 '국민문학'으로까지 인식하는 「고사기(古事記)」 및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관찬정사(官撰正史)인 이들 두 고서(古書)에는 고대 일본의 신화, 일본민족의 탄생과 유래, 그리고 국가형성 등의 모든 것이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고사기(古事記)」에는 제1대 신무(神武)부터 추고(推古)까지 33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제1대 神武부터 제40대 지통(持統)까지 40인의 천황들의 시호(諡號)와 휘(諱)가 나온다.
‘시호’ 또는 ‘휘’라는 것은 왕이나 기타 지체 높은 분의 사후에 그들의 공덕을 기려 생전의 업적이나 특징 따위를 함축하여 붙였던 이름이다.
천황의 이름이 향찰식의 표기로 붙여지게 된 배경과 내력은 무엇인가?
요컨대 한자를 차용(借用)하여 기록한 그 수수께끼 같은 천황의 별칭들을 명쾌하게 해독한 연구서가 이번에 출간되었다. 『神들의 이름』(부제-일본 천황가의 한국식 이름 연구)이 바로 그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일본어의 음과 훈을 빌려 적었으리라 여겨왔고, 또 그렇게 읽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그 일본천황들의 휘(諱)를 고대 한어(韓語)로 해독했을 때 비로소 그 이름들이 지닌 수수께끼 같은 비밀이 확연히 풀린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로써 이 연구서는 일종의 「어문역사연구(語文歷史硏究)」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학술적 의의를 지니는 책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일찍이 일본에 문자, 즉 한문을 전래한 것은 백제인들이었다. 그 사실은 「수서(隋書)」 권81의 「동이전 왜국」 조(條)에 기록되어 있다. 또 「일본서기」에서도 응신(應神)천황 때 태자(太子)의 스승이 된 백제인 아직기(阿直岐)는 다시 왕인(王仁)박사를 천거하였고, 그는 한문의 전적(典籍)들을 본격적으로 전래하여 태자를 가르쳤다. 훗날 왕인 박사는 이른바 서수(書首:후미노 오비토)의 시조가 되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백제의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 유민인 태안만려(太安万侶:오노 야스마로)는 천무(天武)천황의 명을 받아 사서(史書)편찬의 일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후일 원명(元明)천황의 재조(再詔)를 받고 마침내 서기 712년 「고사기(古事記)」 3권을 완성하게 되었다.
특히 천무천황 재위 중에 편찬이 시작되었을 「고사기」 외에, 훗날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원본이 된 「일본기(日本紀)」의 성립연대를 학계에서는 서기 72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무튼 이 두 사서를 근간으로 하여 보완된 「일본서기(日本書紀)」 역시 이른바 백제삼서(百濟三書: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를 많이 인용하고 참고해서 완성된다. 이런 점에서 이들 천황의 긴 이름들이 당시 한어(韓語)의 음과 훈을 빌려 적는 소위 향찰식 표기였던 것으로 볼 개연성은 충분하다. 말하자면 한자를 최초로 일본에 가져와서 사용한 집단은 주지하다시피 한반도에서 도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자기 나랏말을 적는 방식에 고심했다는 것은 결국 본국이었던 고대 한국에서 행했던 방식과 유사했을 것이라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향가(鄕歌)는 8세기 이후 신라인이 향언(鄕言), 즉 신라 말을 적기 위해 소위 향찰(鄕札)을 이용한 표기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이전인 6세기에 백제인들도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기록하는 향찰식 표기법을 사용했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지난 1971년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이 한국식 어순(語順)과 한문이 혼재돼 있는 점, 또 2000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의 인근에서 발견된 목간(木簡)의 내용, 다시 2002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한 목간(6세기 유물) 등을 통해 이미 서기 6~7세기 초에 백제인이 향찰로 쓴 가장 오래된 글귀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신라의 경우, 현존하는 25수의 향가에 국한시켜 말하더라도 「서동요(薯童謠)」라고 통칭되는 향가는 신라 진평왕 시대(579~632년)에 지은 것으로 돼있다. 따라서 그 창작시기의 상한점은 6세기가 되는 것이다. 이 점은 일본에서 만엽가(万葉歌)가 처음 창작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향찰식 표기법의 기원은 8세기의 신라학자인 설총(薛聰)이 이두(吏讀)를 발명했다는 692년보다 훨씬 앞서 나타나고, 「남산신성비(南山神聖碑)」나 「갈항사조탑기(葛項寺造塔記)」의 조성연대인 7세기는 물론이고, 간단한 인명, 관명, 지명 등에서는 한자차용에 의해 우리말을 표기한 방식이 고대 3국에서 기원 1세기 무렵에 벌써 사용되었던 예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인명(人名) 등을 향찰식으로 적고 읽는 방식은, 일본으로 건너간 한지(韓地)의 도래인들에 의해 그대로 전해져, 거기서 더욱 발전하였다. 바로 이 책은 일본의 역대천황(歷代天皇)들의 시호 및 휘를 고대 한어(韓語)로 해독한 연구서이다. 그리고 여러모로 고정관념의 기존 틀을 깨는 참신한 발상과 독창적인 연구방법으로 논지를 펼치고 있는 점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8세기에 이미 「일본서기」편자들의 가필(加筆)과 변개(變改)와 조작(造作)까지 이뤄진 사례들을 이 연구서는 '탐색'과 '쟁점'을 통해 다루고 있어서 날조된 역사는 언젠가 반드시 그 진상을 드러내기 마련임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식 이름을 가진 일본 천황가의 정체를 밝힘과 더불어, 이 연구서가 시사(示唆)하는 바에 따라 가장 괄목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변조하면 훗날 반드시 역사의 보복을 당하게 된다는 교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