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는 작가 김영하가 처음 여행을 떠났던 순간부터 최근의 여행까지, 오랜 시간 여행을 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아홉 개의 이야기로 풀어낸 산문이다. 여행지에서 겪은 경험을 풀어낸 여행담이기보다는, 여행을 중심으로 인간과 글쓰기, 타자와 삶의 의미로 주제가 확장되어가는 사유의 여행에 가깝다. 작품에 담긴 소설가이자 여행자로서 바라본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은 놀랄 만큼 매혹적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떠올렸을 법한, 그러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던 상념의 자락들을 끄집어내 생기를 불어넣는 김영하 작가 특유의 (인)문학적 사유의 성찬이 담겼다.
여행의 감각을 일깨워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깊고 아름다운 산문
첫번째 글 「추방과 멀미」는 2005년 당시, 작가가 집필을 위한 중국 체류 계획을 세우고 중국으로 떠났으나 입국을 거부당하고 추방당했던 일화로 시작한다. 누구에게든 흔치 않은 경험일 추방으로부터 뻗어나가는 작가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목적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에게 여행의 목적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휴식일 것이고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경험과 배움일 것이다. 그러나 여행에는 늘 변수가 생겨나기 마련이고, 그것은 행로를 바꾸고 어떤 경우 삶의 방향까지 바꾸기도 한다. 애초 품었던 여행의 목적이 여행 도중 발생하는 우연한 사건들로 미묘하게 수정되거나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를 목적 대신 얻게 되는 경험, 작가는 이것이 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형식인 여행기가 지닌 기본 구조이며 인생의 여정과도 닮았기에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모험 소설과 여행기를 좋아해왔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는 제목이 암시하듯, 일상과 가족,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피로로부터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에 관해 다룬다. 집안 벽지의 오래된 얼룩처럼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거나 지워지지는 않지만, 여행은 불현듯 그에 맞설 힘을 부여해주기도 한다.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의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의 마지막 부분은 「패전계」로 적의 힘이 강하고 나의 힘은 약할 때의 방책이 담겨 있다. 서른여섯 개 계책 중에 서른여섯번째, 즉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走爲上’으로, 불리할 때는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흔히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온 것이다. (...) 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 한다._본문 67~68쪽
여행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힘이기도 하며(「오직 현재」), 인류의 속성이기도 하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기도 했다(「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앉은 자리에서 모든 정보에 접속 가능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오버투어리즘’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여행 인구는 멈출 기색 없이 증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끊임없이 여행을 갈망하는가. 일상의 장소를 벗어나 생생하고 색다른 경험을 하길 바라는 마음, 여러 가지 일들로 번잡해진 머리를 비우고 먼 곳에서 홀로 휴식을 취하고픈 마음은 우리를 ‘여행하는 인간(호모 비아토르)’으로 만든다.
작가 김영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섬세하고 지적인 사유의 여행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 출연하면서 하게 된 독특한 여행에 대한 글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에서는 김영하 작가의 감각적 사유와 화법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즐겁고 유쾌하게만 보이는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 대한 색다른 인문학적 통찰이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김영하 스토리텔링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는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어 떠도는 자들의 쓸쓸한 숙명과 그로부터 그들이 벗어날 반전이 있는 해법이 담겼다.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은 여행의 또다른 기쁨인 타지에서 경험하는 환대에 대한 글이다. 1968년 12월 24일 아폴로 8호가 찍은 지구돋이Earthrise 사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글은 인류 모두가 지구 위의 승객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타자에 대한 환대 때문임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서로를 적대하고 살육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이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을 제공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떠나보내오기도 했다. 거의 모든 문명에, 특히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는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계율들이 남아 있다. _본문 139쪽
그리하여, 다시 여행으로 돌아가다
「노바디의 여행」은 성숙한 여행자의 태도와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유비해 보여주는 글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담긴 고대의 지혜에 대한 반짝이는 해석이 담겨 있다. 허영과 자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지혜로운 여행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인생을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전체의 마지막 글 「여행으로 돌아가다」에는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여행자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담겼다. 한곳에 평화롭게 정착하지 못한 채 항구적인 여행 상태인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보내는 담담한 위로의 글이기도 하다.